책 리뷰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vainmus 2019. 8.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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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 300만의 인천에서 유명한 종합병원이 있다.

길병원.

산부인과 의사 출신 이길녀 여사가 세운 병원이다. 처음에는 인천시청이 있는 구월동 부근에 1동짜리 큰 건물 하나뿐이었다. 매년 여기저기 확장공사를 하고 건물을 사들여 병원을 늘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구월동 일대가 병원 타운이 되어버렸다. 놀라운 확장력이다. 듣기로는 병원 1년 수입이 3000억이 넘는다고 한다. 

 

인천 사람들(특히 오래 사신 어른들)은 길병원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의료사고가 빈번하다고 얘기를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8-90년대에 말들이 많았다. 이길녀 참 독하다는 소리도 들은 듯하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도 큰 종합병원이 길병원 외에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많이 가게 된다. 

 

몇 년전 엄마가 입원했을 때 간병을 했다. 대략 일주일 정도 병원에서 지내다 발견한 책이 있다. 시중 판매되는 책이 아니라 이길녀 홍보용 소책자라고 해야 할까. 이길녀 자서전이다. 길병원 대기실에 여러 권 널려있는데 무료함도 달랠 겸 읽어봤다. 그런데 예상외로 재미가 있었다. 느낀 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책 리뷰를 해본다. 

 

솔직히 이런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류는 100%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기억의 왜곡과 누락, 미화가 분명 있기 때문에. 그래도 한 사람 인생의 큰 궤적을 알아보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난 개인적으로 이길녀 여사의 인생 여정 중 성공으로 빛나는 부분보다 힘들어하고 마음고생했던 부분이 와 닿았다.

 

 ▶  미국 유학 준비

 

이길녀 여사는 6.25 세대다. 대한민국이 가장 가난하던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지금이야 별생각 없이 학업에 대한 것만 신경 쓰면 되지만 이길녀 여사는 그러질 못했다. 그 당시 한국과 미국의 생활수준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니까. 

 

이길녀 여사는 미국 유학 전 친구와 일부러 고급 호텔에 묶으며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먼 곳으로 떠나기 전 친한 친구끼리 하는 아기자기하고 신나는 작별 파티 같은 게 아니다. 미국인의 생활 방식을 미리 익혀가서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어리바리한 촌년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닫는 법 등을 익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니, 이거 참 웃기지 않은가. 

 

인천의 대부호, 한 도시의 유지, 구월동 일대 한 구역을 자신의 병원 건물들로 채우고 있는 인물의 젊은 시절이라곤 상상이 안 된다. 마치 얼마 전에 내가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울 때 뭘 시켜야 할지 몰라서 전날에 컴퓨터로 요리를 알아보고 프린터로 메뉴를 출력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렇게 동질감을 느끼나? 아무튼 신선했다. 

 

 ▶  영어

 

미국 유학 가서도 문제가 있었다. 영어였다. 한국인의 고질병이다. 한국인은 영어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전화로 업무지시를 받게 되면 초 긴장 상태에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래도 불안감에(의료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니까) 건물 내부를 달려가서 직접 그 사람과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해야만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참 피곤했을 것이다. 남들은 그냥 간단히 전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이토록 힘들게 해야 했으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보통 사람 같은 대목이 나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  동인천 이길녀 산부인과

 

이길녀 여사는 유학을 마치고 동인천에 이길녀 산부인과를 열었다. 당시 열악한 의료시설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산부인과는 더 심했다고. 책을 보면 이 여사는 정말 병원 밖을 나오지 못하고 밀려드는 환자만 진료했다고 한다. 

 

언제는 몸이 잘못되어 죽을 줄 알지만 돈이 없었던 산모, 늙은 친정어머니와 함께 모든 걸 체념한 듯 짐을 싸서 병원을 떠나려는 모녀의 앞을 이길녀 여사는 막았다. 돈 없어도 사람 목숨이 먼저니 일단 치료를 하시라고. 

이길녀 여사를 칭송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지금 나이를 들어 인천 시민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가 된 그녀의 진정성 있던 시절만큼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산부인과 시절은 훗날 구월동에 종합병원인 길병원을 세우는 데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인천 시민들의 마음도 같이 얻지 않았을까?

물론 그 당시로서는.

 

 ▶  구월동 길병원 건축 공사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건물주도 마냥 편한 건 아니다. 세입자 관리, 건물 관리가 생각보다 신경 쓸 것이 많다고 한다. 이미 만들어진 건물 관리도 이럴진대 새로 빌딩을 신축하는 건축주라면 얼마나 많은 정신적 긴장과 피로가 발생할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의료사고가 참 억울하고 답답한 게 환자는 의료지식이 없어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잘 알지 못하니 건축 공정에 문제가 있거나, 심지어 중간에 돈을 슬쩍하기 위해 건축 자재를 빼돌려도 대처하기가 힘들다. 건축사와 지역 조직폭력배가 연계되어 있어 골치 아픈 경우도 있다고 한다. 책에서 그리 많은 부분을 할애하진 않지만 길병원 공사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이길녀 여사의 모습도 나온다. 

 

가끔 지날 때마다 큰 건물이 하나씩 새로 올라가며 '길병원'이라고 간판이 달려있는 걸 보며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저렇게 쑥쑥 성장을 할까?,라고 생각했다. 이길녀란 사람 자체는 뭔가 우리와는 다른 별종일 거라 여겼지만 초창기에 경험이 없는 분야에서 쩔쩔매는 장면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읽고 난 후의 소감

 

세상과 인간사에 대해 능수능란을 넘어 노회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을 듯한 노인, 원래부터 그랬을 것 같은 한 인물의  순수했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하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 <대부>의 말론 브란도의 젊고 순수했던 청년시절을 보는 느낌이 이러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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